엄정현
[한국심리학신문=엄정현]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 구장인 펜웨이 파크(Fenway Park)의 구장 모양. 좌측 외야는 홈으로부터 가까운 반면, 우측 외야는 상당히 깊게 파여있다.[1]
형평성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위 ‘비대칭 구장’은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는 흔한 일이다. 서른 개의 구장 중 두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대칭 구장에다가, 제각각으로 생겼다. 사진에 보이는 펜웨이 파크의 좌측 외야에는 37ft 높이와 231ft 너비의 ‘그린 몬스터’라고 불리는 거대한 담장이 있다. 그리고 홈에서 그린 몬스터까지의 거리는 95m인 반면, 우측 가장 깊은 외야는 128m까지 멀어지기도 한다.[2]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제멋대로 생긴 구장은 이미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이 구장들은 왜 이렇게 제멋대로 생기게 되었을까?
미국이 제멋대로 생긴 야구장을 갖게 된 이유
펜웨이 파크(Fenway Park) 주변 도심 구획의 지도. 그린 몬스터를 만든 Lansdowne St.이 보인다.[3]
20세기 초, 미국의 초기 야구장들의 모양은 그 주변의 환경에 맞춰 정해졌다. 앞서 언급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는, 1900년대 초 야구가 엄청난 인기를 얻음에 따라 구단의 가치를 높이길 원했다. 이에 기존 홈구장을 떠나, 새 홈구장을 짓고자 했다. 보스턴의 새 홈구장은 매력적인 입지였던 Ipswich St.과 Lansdowne St. 사이의 도심 구획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 결과 Lansdowne St.에 의해 싹둑 잘린 좌측 외야에는 위에서 언급한 그린 몬스터가 생겼고, 필드는 비대칭일 수밖에 없었다.[3]
그리피스 스타디움(Griffith Stadium)의 당시 모습. 중앙 담장 뒤로 구단이 사들이지 못했던 큰 나무가 보인다.[15]
또 한때 LA 다저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L.A. 메모리얼 콜리세움은 좌측 담장이 우측 담장에 비해 현저히 짧은 거리에 자리해 있다. 그러니 다른 구장에서는 좌익수에게 잡힐 평범한 뜬공 타구가 홈런이 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연고지를 이전한 LA 다저스가 사용할 야구장이 없어 육상과 풋볼 경기를 위한 구장을 야구장으로 개조했기 때문이었다.[4] 마지막으로 MLB에는 개막전 시구를 미국 대통령이 진행하는 관습이 있는데, 그 전통이 시작된 구장인 그리피스 스타디움도 웃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리피스 스타디움은 호기롭게 워싱턴 D.C. 도심 한복판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구단은 개장할 때까지 외야 담장 밖에 있는 5채의 집과 한 그루의 나무를 끝내 사들이지 못했고, 자연히 외야 담장 중간이 경기장 안쪽으로 돌출돼있는 모양을 갖게 되었다.[5]
그땐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일부러 그렇게 제멋대로 짓는다고요?
볼티모어 오리올즈의 홈 구장인 오리올 파크 앳 캠든 야즈(Oriole Park at Camden Yards). 오른쪽에는, 볼티모어 시내의 오래된 창고 건물인 B&O Warehouse을 야구장의 배경으로 들고 들어온 모습이 보인다.[6]
주목할 만한 점은, MLB에서는 비교적 최근 설계하여 주변 환경의 제약 없이 원하는 대로 지을 수 있었음에도 의도적으로 야구장의 모양을 대칭이 아닌, 비대칭의 형태로 설계한다는 점이다. 볼티모어 시내의 한복판에 1992년 개장한 볼티모어 오리올즈의 홈구장 오리올 파크는 고전적인 20세기 초 제각각의 모양을 가진 구장들을 의도적으로 답습했다. 우측 장외에 위치한 오래된 창고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도시의 풍경으로서 경기장에 들고 들어왔다.[6] 또, 텍사스 레인저스의 홈구장인 글로브 라이프 필드는 대지의 물리적인 제약이 없었음에도, 외야 담장 거리에 구단의 전설적인 선수들의 등번호나 상징적인 숫자들을 대입하여 비대칭 구장을 만들었다.[7] 왜 구단들은 가지런한 대칭 구장이 아닌, 구장마다 다 다르게 생긴 비대칭 구장을 의도적으로 지은 것일까?
서울역 경관.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에게는 벅차고도 떨리는 기억이, 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행의 설렘이 묻은 기억이 깃들어 있는 공간일 것이다.[14]
위에 설명했듯, 제멋대로 생긴 구장은 갑자기 그 모양이 탄생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의 환경과 역사, 이야기들이 층층이 쌓여 그 모양으로 빚어진 것이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김광현 명예교수에 따르면, 건축은 우리의 기억을 담는 저장고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위인의 동상이나 기념관, 또는 추모 공간을 세우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건축물과 장소는 우리의 기억에 깊이 새겨짐과 동시에, 우리의 기억도 건축물과 장소에 깃드는 것이다.[8]
연구 결과 또한 이 지점을 뒷받침한다. 사람들이 건축물이 만들어진 이유나 특징적인 역사와 같은 그 건축물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 그 건축물은 단순 물리적 피사체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이때 그 건축물이 가진 이야기를 환경심리학에서는 architectural narrative, “건축학적 서사”라고 한다. 건축학적 서사는 일방적으로 건축물이 지닌 사회, 문화적 의미와 의도가 사람들에게 전달되게 하는 매개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그 공간의 의미를 만들게 하기도 한다. 특히 강력한 건축학적 서사는 그 사용자들로 하여금 공간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더해주고, 그들의 경험을 그 건축물의 서사의 한 부분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본래 이 개념은 홀로코스트 등의 역사적 사건의 서사를 담은 추모 공간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 하지만 2022년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야구장 등의 스타디움도 그 서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심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야구장이 가진 서사가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다음에도 그곳을 방문하도록 하는 유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는, 야구장이 가진 서사가 사람들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매개체가 되고, 그 감정이 긍정적(approach)인지, 부정적(avoidance)인지 여부에 따라 사람들의 재방문 의사가 결정된다. 야구장의 서사를 고스란히 담아낸, 제멋대로 생긴 모양은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강력한 도구인 것이다.[9]
제각각의 이야기를 담은 야구장, 또 가고 싶네요!
지난 3월 5일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에서 열린 개장식 행사.[13]
오리올 파크를 구상한 조셉 스피어와 그 건축사가 건축학적 서사를 알고, 이를 이용하여 구장을 설계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 설계자들과, 특히 야구장을 사랑하는 팬들은 쿠키 커터* 구장들에 환멸을 느끼고 나서, 다른 곳들과는 구별되고(distictive) 전통적인 옛 구장을 원했다.[10] 연고지의 도심 속에 완전히 스며들어 다른 팀들은 갖고 있지 않은, 그리고 우리만의 이야기가 깃든 야구장. 뉴욕 타임즈는 이런 야구장을 꿈의 구장이라 평가했다.[11]
- 찾아보기
* 쿠키 커터 : 1960~80년대까지 MLB의 대부분의 구단이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다목적구장. 이들은 도시의 팽창, 그리고 교외화와 맞물려 교외에 넓은 대지에 지어졌으며, 풋볼 팀과 구장을 공유해야 했기에 큰 원형으로 지어졌다. 원형에,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교외에 지어지다 보니 이 다목적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한 팀들끼리는, 그 홈구장의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팬들은 본인이 어디에 있는지 느끼지 못했고, 그 전의 도심에서의 야구장을 그리워했다. 그렇게 ‘레트로’를 외치며 돌아온 것이 오리올 파크.[12]
- 출처
1) Video: Jackie Bradley Jr. throws a ball over Fenway Park’s center field wall from home plate [NBC Sports]. (2014). https://www.nbcsports.com/mlb/news/video-jackie-bradley-jr-throws-ball-over-fenway-parks-center-field-wall-from-home-plate
2) Facts and Figures: Read more about Fenway Park below. [redsox.com]. https://www.mlb.com/redsox/ballpark/facts-figures
3) FENWAY PARK TIMELINE [redsox.com]. https://www.mlb.com/redsox/ballpark/museum/timeline#top
4) A Home Like No Other: The Dodgers in L.A. Memorial Coliseum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 (2011). https://sabr.org/journal/article/a-home-like-no-other-the-dodgers-in-l-a-memorial-coliseum/
5) Griffith Stadium [ballparksofbaseball.com]. https://www.ballparksofbaseball.com/ballparks/griffith-stadium/
6) Oriole Park at Camden Yards (Baltimore, MD)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 https://sabr.org/bioproj/park/oriole-park-at-camden-yards-baltimore/
7) Globe Life Field Ballpark Facts [rangers.com]. https://www.mlb.com/rangers/ballpark/facts-figures
8) 김광현. (2018).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 뜨인돌.
9) Weixia Zhang. (2022). Architectural Narrative Shapes Brain Activities Underlying Approach-Avoidance Response: A Case study of the Stadium. Frontiers in Neuroscience. Vol.16, 1-11
10) Cookie Cutter Stadiums – Part II [Postcard History]. (2023). https://postcardhistory.net/2023/05/cookie-cutter-stadiums-part-ii/
11) Oriole Park at Camden Yards (Baltimore, MD)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 https://sabr.org/bioproj/park/oriole-park-at-camden-yards-baltimore/
12) Goodbye, cookie-cutter stadiums [The Hilltop Monitor]. 2017. https://hilltopmonitor.jewell.edu/goodbye-cookie-cutter-stadiums/ , Cookie Cutter Stadiums – Part II [Postcard History]. (2023). https://postcardhistory.net/2023/05/cookie-cutter-stadiums-part-ii/
13) [포토] '웅장 그 자체'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 [대전일보]. (2025).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656/0000123659
14) [Pick] 철도공단 "10년 후 서울역 밑그림 그린다" [철도경제]. (2022). https://www.redai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77
15) Griffith Stadium, Washington D.C., May 21, 1949 – American League bottom feeders the Browns and Senators in a 7-6 thriller [Baseball History Comes Alive]. (2017). https://www.baseballhistorycomesalive.com/griffith-stadium-washington-d-c-may-21-1949-american-league-bottom-feeders-the-browns-and-senators-in-a-7-6-thr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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