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다연
[The Psychology Times=진다연 ]
이전 기사를 통해 관계 중독과 공의존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았다. 파괴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본인의 가치를 찾는다는 설명이 조금은 생소하고 모순되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공의존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우리는 자신을 향한 관계의 고통을, 공의존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그 기저에 있는 심리적 개념인 ‘자기(self)’에 대해 알아보자.
공의존, 자기(self)의 분실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우리 안에 뚜렷이 구별되는 핵심 자기(core self)가 존재하며, 최상의 조건에서 개인의 타고난 잠재력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정신분석가 카렌호나이 (karen horney)는 이 핵심 자기를 실제 자기(real self)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실제 자기는 ‘진짜 나’ 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무엇을 원하며 내 진정한 감정은 어떤지, 느껴지는 그대로의 자신 말이다. 그러므로 실제 자기는 자신의 진정한 느낌, 욕구, 재능을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여 내면의 진짜 욕구와 감정은 어떤지를 묻고, 이에 따른 내면의 평가에 따라 결정을 내리며, 또한 이를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실제 자기는 ‘온전한 나’로서, 자신을 향한 건강한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것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반면 이상적 자기는 방어적 경험에 의해 형성된 허구의 자기이며, ‘사랑받으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반영한다. 쉽게 말해 ‘진짜 나’가 아닌, ‘내가 되어야 하는 나’인 것이다. 이상적인 모습을 좇아가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으나, 그 노력이 건강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실제 자기의 목소리에 반해서 선택해야 하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상적 자기가 인생에서의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상적 자기가 ‘전교 1등’인 학생은 실제 자기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포기하거나, 밤낮 쉴 새 없이 공부하느라 건강이 망가지거나, 공부를 위해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을 없애 홀로 남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
여기서 공의존은 실제 자기와 이상적자기, 둘 다 해당하지 않는다. 바로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공의존자는 그 어떤 자기 없이, 세상에 내보이는 ‘거짓 자기’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공의존자는 실제 자기와 단절되어 있으며, 타고난 자기로는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대신 타인, 물질 등 자신 외의 것들을 기반으로 삼아 사고와 태도를 형성한다. 여기서 관계 중독과의 연결고리가 등장한다. 관계 중독은 타인을 기반으로 자신의 ‘자기’를 형성하는 공의존성을 띠고 있다. 공의존자들은 어떻게든 상대를 뿌리로 삼은 거짓 자기를 유지하고, 이에 반하는 다른 자기들을 감추는 것에 온 힘을 쏟아붓는다. 이런 행동은 진정한 자기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자기(self)를 갉아먹는 ‘내면화된 수치심’
그렇다면 공의존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내면화된 수치심’이다. 내면화된 수치심이란, 무시당하거나 거절당하는 경험이 축적되어 수치적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수치적 자아는 모든 것을 자신의 무능함으로 귀결시킨다. <관계 중독>의 저자 달린 랜서(Darlene Lancer)는 이를 ‘속이 다 드러나 보이는, 아물지 않은 상처’라고 표현한다. 공의존자는 흔히 이런 내면화된 수치심이 사고의 근본으로 자리하고 있다. 내면화된 수치심으로 인해, 모든 거절과 무시, 관계 속의 아픔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주변 인물이나 매체로 ‘내가 못나서, 내가 잘하지 못해서 상대에게 버림받았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쉽게 접해보았을 텐데, 이것이 바로 내면화된 수치심이 일으키는 전형적인 그릇된 사고이다. 이런 생각은 내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모습이었다면 달랐을 거라는, 그랬다면 버림받지 않았을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끝도 없이 연장된다.
이러한 종류의 수치심은 스스로 고립감을 자초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그렇게 생긴 고립감은 도리어 수치심을 악화시킨다. 수치심뿐만 아니라 우울, 외로움, 공허감, 죄책감까지 악화시킬 수 있는데, 이 순서는 충분히 뒤바뀔 수 있다. 그 예를 들어보자면, 공허감으로 인해 인생의 행복, 만족 등을 놓치고, 이로 인해 우울감이 더욱 심해져 자신은 인생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다는 믿음이 확고해지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굳건해질수록 내면화된 수치심 또한 견고해진다. 이 다섯가지 감정은 복합적으로 서로를 거치며 몸집을 키워나가고, 야금야금 실제 자기를 갉아먹는다. 그러다 결국 자기는 사라지고, 공의존과 관계 중독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내면화된 수치심이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순서이다.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인지 평가라 할 수 있는데, 많은 공의존자들은 자기 자신을 ‘욕구를 채울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자신이 이기적이고, 상대에게 필요 이상으로 요구하는 게 많으며, 애정에 굶주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의 행동과 감정을 오로지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타인의 부정적 언행을 자신의 문제로 치부함으로써 언제든 책임감과 죄책감에 시달릴 준비가 되어 있다. 멜로디 비에티(Melody Beattie)는 공의존자를 ‘상대방의 행동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허락한 사람이자, 그 상대방을 통제하고자 고심하며 집착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즉,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공의존은 타인이 우리를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또 다른 이름의 자학이다.
우리는 고통 받는 관계를 지속함에 있어, 관계의 유지라는 표면적인 목적 아래에 공의존을 느끼고 있을 수 있다. 필자 본인도 상대의 행동에 일희일비하고, 상대의 기분이 나의 하루를 좌우했던 적이 있다. 또 상대가 행하는 본인에 대한 부정과 거절이 모두 ‘내가 나여서’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래서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면 다 해결된다는 오만과 함께, 상대가 던지는 화살보다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진 화살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앞서 이 생각을 ‘오만’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의도대로 상대를 통제할 수 없다. 또한 타인이 나에게 주는 고통이 ‘내가 못난 사람으로 태어나서’라는 사실 아닌 이유로 절대 합리화될 수 없다. 그 고통을 감내하는 스스로를 멋지게 느껴서도 안 된다. 충분히 약으로 물리칠 수 있는 바이러스를 스스로 주사해 가며,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간다고 스스로를 강인하다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은가?
이렇듯 관계에 있어서 완벽주의는 자학과도 같다. 우리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잘못과 부족함이 원인이 아닐 때가 더 많다. 또 나에게 좋지 못한 사람을 견디는 것이,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방증이 되는 것도 아니다. 타인으로부터 나의 가치를 찾기보다, 나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보자. 스스로 빛날 수 있는 불꽃의 씨앗은, 언제나 내 안에 자리에 있다는 걸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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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문헌
달린 랜서. (2018). 관계 중독(수치심과 결별하고 공의존에서 탈출하기). 교양인.
박수경. (2022). 관계중독(집착, 스토킹, 폭행, 불륜의 또 다른 이름). 가연.
커트 톰슨. (2019). 수치심(수치심에 관한 성경적·신경생물학적 이해와 치유).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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