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언제나 꿈에서 깨어남을 느끼는 삶 - 기억상실증으로 알아보는 기억의 종류
  • 기사등록 2024-06-03 11:25:47
기사수정

[한국심리학신문=서정원 ]


  1. 언제나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주인공들

‘기억상실증’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장면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기억상실증은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소재로 많이 쓰여왔기에 전형적으로 생각나는 틀에 박힌 몇몇 장면들이 있습니다. 사고로 정신을 잃었다가 병원에서 깨어난 주인공이, 앞에 있는 연인을 보고 “이 사람은 누구야?”하고 묻는 장면같이 말입니다. 이 주인공들은 흔히들 사고 전의 몇 년간의 과거 기억이 없어져서 연인에 대한 기억이 전부 날아가 버렸음을 경험하고는 합니다. 이처럼 기억상실증은 로맨스 작품에서 주인공의 사랑의 큰 난관으로 활용되는 흔한 클리셰 장치입니다.

 


  1. 클리셰를 깨버린 기억상실증 영화 : <메멘토>

반대로 이러한 클리셰와 사뭇 다른 영화 하나를 추천해보고자 합니다.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1년작 <메멘토>입니다.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 또한 기억상실증을 겪고 있는 환자입니다. 하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리기 전의 과거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는 데서 기존 클리셰와 차이점을 보입니다. 특히, 레너드에게는 그가 사랑했던 아내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리만치 남아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는 살해당했고, 주인공은 아내를 죽인 범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추적을 해나가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레너드에게 문제가 생긴 기억은 사고 전의 과거 기억이 아니라, 사고 후의 기억입니다. 레너드는 사고 이후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사고가 나기 전의 과거 기억은 있지만, 그 이후로의 새로운 기억은 10분마다 리셋됩니다. 그렇기에 단지 몇 시간 전에 얘기를 나눈 사람에게도, 다시 마주칠 때는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레너드는 강박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습관을 가집니다. 다시 기억을 잃을 자신을 위해, 그동안 자신이 어디서 지냈으며, 누구를 알고 있으며, 그동안 알아낸 사실은 무엇인지를 계속 기록합니다.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고, 중요한 것은 아예 문신으로 새겨놓습니다. 때문에 이 영화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레너드의 몸에 빼곡히 새겨진 문신입니다. 레너드는 자신의 기억이 아닌 기록을 따라가며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추적해갑니다. 이러한 레너드가 겪고있는 질병은 기억상실증 중에서도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라고 합니다.


영화 <메멘토>의 정말 흥미로운 점은 관객들에게도 레너드의 선행성 기억상실을 함께 경험하게 해주는 전개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그저 시간순으로 흘러가지 않고, 가장 최신의 장면부터 역순으로 한 장면, 한 장면씩 거슬러 올라갑니다. 관객들은 주인공이 어떻게 지금 상황에 놓인 것인지를 장면마다 새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 이전 장면에 대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으니 주인공이 왜 그 장소에 오게 되었는지, 왜 그 물건을 지니고 있는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를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관객은 그저 영화의 관찰자로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기억이 없어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이 직접 되어보는 느낌을 받습니다.



  1. 임시파일이 저장되지 못하는 컴퓨터

그렇다면 이러한 선행성 기억상실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요? 기억상실과 같은 큰 인지장애는뇌의 특정부위가 손상되었을 때 발생합니다. 특히 선행성 기억상실은 주로 뇌의 ‘해마’ 부위가 손상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해마는 일종의 기억의 성질을 전환해주는 역할을 하는 부위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기억의 종류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두뇌 측두엽의 해마 부위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각, 즉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보고 접촉하는 것에 대한 기억을 ‘감각기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감각기억은 해마로 전달되면서 일시적인 ‘단기기억’으로 저장됩니다. 그리고 해마는 단기기억들 중에 강렬했거나 반복되었던 정보를 대뇌피질로 보내어 ‘장기기억’으로 만듭니다. 단기기억은 기껏해야 30초 정도밖에 지속되지 못하지만, 장기기억은 평생 지속되기도 할만큼 오래 남는 기억입니다. 즉, 해마는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해주는 중요한 일을 하는 부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해마에 손상을 입게 된다면 우리의 기억은 어떻게 될까요? 앞서 보았던 레너드의 사례가 그 답이 될 것 같습니다. 컴퓨터로 비유해보자면 RAM에서 임시파일로 남아있던 정보가 하드디스크로 넘어가 완전히 저장되지 못하는 격입니다. 최신 파일은 하나도 참고하지 못한 채로, 무언가를 시작할 때마다 새로운 백지 파일의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컴퓨터가 아닌, 내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바로 선행성 기억상실증입니다.

 


  1. 언제나 꿈에서 깨어남을 느끼는 삶

<메멘토>가 실제가 아닌 영화 속 이야기라는 것에 감사함이 느껴지시나요? 안타깝게도 영화보다 더 심각한 선행성 기억상실을 겪고 있는 실제 사례도 존재합니다. 바로 영국의 음악가 클라이브 웨어링(Clive Wearing)의 사례입니다. 클라이브 웨어링은 뇌염으로 인해 해마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선행석 기억상실증을 겪게 되었습니다. <메멘토>의 레너드의 단기적인 기억력은 10분이었지만, 클라이브 웨어링의 기억력은 7초에서 30초에 불과합니다. 


클라이브는 기억력이 사라질 때마다 마치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이 느낀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 ‘깨어남’을 느낄때마다 자신의 곁에 있는 아내에게 자신이 얼마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질문하고는 합니다. “손톱만큼도 생각이 안나! 우리가 병원에 있어? 난 지금까지 본게 아무것도 없는데. 내 눈에는 몇 초 전에 보기 시작했거든.”



실제로 그의 일기장을 읽으면 이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일기장은 대부분 내용이 동일합니다. 몇 분 간격으로 계속해서 “Now I Am Awake(이제 나는 깨어났다)”를 적어놓았기 때문입니다. 클라이브는 새롭게 깨어났음을 기록할 때마다 자신이 이미 깨어나 있었음을 부정하는 듯이 이전의 기록은 벅벅 지워두었습니다. <메멘토>의 레너드는 자신이 이전에 적은 기록에 의존해서 활동해나갔지만, 클라이브 웨어링은 애초에 자신이 그 기록을 적었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했다고 합니다. 

 


  1. 기억상실에도 남아있는 음악적 능력



클라이브 웨어링의 사례가 유명해진 이유는 단순히 그의 짧은 기억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로 기억의 상실에도 멀쩡히 유지하고 있는 그의 음악적 능력 때문입니다. 클라이브는 자신이 피아노를 칠 수 있는지 여부도 모르지만, 피아노 앞에 앉으면 악보를 읽고 완벽히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심지어 BBC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서 과거 자신이 이끌었던 웨스턴 민스턴 대성당 합창단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공연 후 단 몇 분 뒤에 자신의 지휘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였지만 말입니다. 


기억상실 이후에도 이토록 높은 음악적 능력을 잘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장기기억 중 절차적 기억의 특성 때문입니다. 절차적 기억은 어떤 과제를 해결하거나 행동을 할 때 요구되는 지식, 기능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억입니다. 


절차기억의 대표적인 예는 자전거를 타거나,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같은 기억입니다. 만약 자전거 타는 방법을 스스로에게 설명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요? 균형을 어떻게 잡으며, 근육에 얼마나 힘을 주어야하며, 핸들은 몇도로 꺾어야 하며, 허리는 얼마나 숙여야 하는지, 말로써 설명하실 수 있으신가요? 훨씬 더 쉬운 방법은 일단 자전거를 타보는 것입니다. 과거에 타본 경험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흔히 몸이 기억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뇌의 절차적 기억 때문입니다. 


이러한 절차적 기억은 일반적인 일화나 지식에 대한 기억과 달리, 뇌의 운동 피질, 즉 몸의 움직이는 영역에 저장되는 기억입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습득한 기술이 운동 패턴으로 저장되면 무의식적으로도 사용한 일종의 자동화가 이루어집니다. 때문에 기억 전환에 중요한 해마가 손상되어도 절차기억은 유지될 수 있다고 합니다. 클라이브의 음악적 능력은 그에게 남아있는 과거의 장기기억 중, 음악적인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절차적 기억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현재를 혼란스러워해도, 연주할 때만큼은 마치 병을 앓기 전의 과거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음악은 그에게 있어서 과거 기억의 끈을 붙잡게 해주는 도구가 됩니다.

 


  1. 기억은 현재를 잡아두는 것

이번 기사를 통해서는 과거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고통이 아니라, 현재를 잡아두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통을 느끼는 기억상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신경과학자들은 클라이브 웨어링과 같은 기억상실증 환자들을 연구함으로써 인간 기억의 종류와 그 특성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질병과 사고를 통해 인류에게 큰 공헌을 했지만, 기억상실증 환자 본인들은 그 삶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참 슬퍼집니다. 현재를 연속해서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삶, 늘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으로 사는 삶은 과연 어떨까요? 기억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를 향유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분명 우리 삶의 큰 의미를 주고 있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자료출처>

TED Ed  (https://ed.ted.com/lessons/what-happens-when-you-remove-the-hippocampus-sam-kean)

Oliver Sacks, 『뮤지코필리아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 알마(2012)






기사 다시보기  

당신의 눈을 믿지 말아야 하는 이유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기회를 갖고 태어난다: 뇌 가소성

언어가 다르면 세상의 색깔이 달라진다

컴퓨터는 못 읽는 티켓팅 보안문자, 우리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주의력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

혀의 지도는 아직도 그려지고 있다

닿지 않아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우리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psytimes.co.kr/news/view.php?idx=8690
  • 기사등록 2024-06-03 11:25:47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